ball mania

야구 모자 없인 문 밖을 나설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폭격처럼 뒤흔드는 어떤 사건은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버스 안에서 옆 자리에 앉은 근사한 남자, 길을 걷다 우연히 본 쇼윈도의 호화로운 코트,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아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음식점의 환상적인 음식 맛처럼.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일련의 사건이지만 모두 마음을 뒤흔들게 한다는 맥락으로 엮이고, 마음을 흔들게 하는 지점이 모두 아름다움으로 귀결된다. 그런 귀결점이 패션에 있어 나에게는 늘 모자였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많은 모자를 사들였고 썼다. 여름엔 밀짚으로 촘촘하게 엮은 모자를, 겨울엔 니트로 성글게 짠 모자를 썼다. 챙이 넓은 페도라도, 복고풍의 헌팅캡도 써봤다. 아무 옷이나 대충 꺼내 입어도 예쁘게 다듬은 모자 하나면 꽤 잘 차려입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모자가 쌓이고 쌓여 옷장을 넘어 선반과 책장까지 점령할 무렵 모자를 사들이는 일에도 이골이 났다. 그 어떤 모자도 시들해졌다. 그렇게 모자를 한동안 잊고 지냈다. 열렬하게 사랑했던 애인도 그처럼 쉽게 잊히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러다 몇 년 전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 만난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다시 불을 지폈다. 고전적인 탐미주의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그는 스스로가 창조하는 옷과는 상반되게, 늘 뉴욕 양키스의 야구 모자를 쓰고 있다. 어찌나 오래 썼는지 색이 희끄무레하게 바래고 챙의 끝이 닳아 터진 야구 모자를 쓴 그가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사람들 틈에서 가장 멋있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장식적인 옷을 만드는데도 정작 스스로는 모든 걸 초연한 듯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불현듯 트렌드에서 한발 물러난 듯 보이는 야구 모자가 어떤 것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는 걸 알게 됐다. 무엇보다 몸을 타고 유려하게 흐르는 블라우스나 드레스에 걸치면 희열은 배가된다. 실제로 패션 위크를 찾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패션계 종사자들이 그렇게 입고 다녔다. 미처 머리 손질을 하지 못해 쓰고 외출했을지는 몰라도 야구 모자 하나가 정적인 긴장감이나 지루한 고리타분함을 단숨에 날려주는 전천후 비밀 병기였던 것. 무성의함에서 오는 멋스러움이 일종의 해방감을 주고, 스포츠적인 편안함이 비즈니스석에 앉은 듯한 안락함을 준다. 무엇보다 황당한 것이 유행이 되고 쉽게 합당함을 얻는 요즘, 옷 하나 마음 내키는 대로 사지 못할 때 야구 모자 하나가 쉽게 동시대적 방식으로 멋을 선사할 것이다. 단, 최신 유행하는 브랜드보다는 1990년대를 풍미한 스포츠 브랜드나 그 시절 인기 좋았던 스포츠 팀의 로고를 새긴 것으로 써야 옷 좀 잘 입는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난 뒤 이베이를 뒤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editor kim sun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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